오늘은 국제거래에서 에스크로(Escrow) 계약의 준거법 문제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에스크로란 거래 당사자 사이에 중립적 제3자가 대금이나 물건을 맡아두었다가 조건이 충족되면 이를 인도하는 방식입니다. 국내 거래에서도 활용되지만, 국제거래에서는 당사자가 서로 다른 국가에 소재하기 때문에 어느 나라 법을 적용할 것인지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합니다.
사건 개요
한국 소재 IT 기업 A사(대표 김모 씨, 45세)는 독일 소재 소프트웨어 개발사 B사와 약 38억 원 규모의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양 당사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점을 둔 에스크로 대행사 C사를 통해 대금을 예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계약서에는 에스크로 조건이 상세히 기재되었으나, 준거법(Governing Law) 조항은 매매계약 본체에 '대한민국 법'으로만 기재되어 있었고 에스크로 계약 자체에 대한 준거법은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기술 인도 후 품질 하자 분쟁이 발생하자, A사는 에스크로 대금의 반환을 요구했고, B사는 조건 충족을 주장하며 대금 지급을 C사에 청구했습니다. C사는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라 법원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 대금을 동결한다고 통보했습니다.
이 사안에서 세 가지 핵심 법적 쟁점이 드러납니다. 첫째, 에스크로 계약의 준거법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둘째, 에스크로 대행사의 의무와 면책 범위를 누가 정하는지, 셋째, 복수 국가 법원에 걸친 관할 충돌 문제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쟁점 1. 에스크로 계약의 준거법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국제거래에서 에스크로 계약은 본 계약(매매계약, 라이선스 계약 등)과는 별개의 독립적 약정으로 취급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점이 실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본 계약의 준거법이 '대한민국 법'이라 하더라도, 에스크로 계약까지 당연히 같은 법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1 당사자 합의 우선 원칙
국제사법 제25조에 따르면, 계약의 준거법은 당사자가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선택한 법에 의합니다. 에스크로 계약서에 준거법 조항이 별도로 있으면 그에 따릅니다.
2 합의가 없을 때의 보충적 연결
준거법 합의가 없는 경우, 국제사법 제26조에 의해 계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가의 법이 적용됩니다. 에스크로의 경우 대행사의 소재지, 예치금 보관 장소, 이행지 등이 밀접 관련성 판단의 주요 요소입니다.
3 이 사례에서의 적용
A사-B사 간 에스크로 계약에 별도 준거법 합의가 없으므로, 에스크로 대행사 C사의 소재지이자 대금 보관지인 미국 캘리포니아 주법이 준거법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과적으로 본 계약(한국법)과 에스크로 계약(캘리포니아 주법)의 준거법이 분리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를 실무에서는 '준거법의 분열(depecage)'이라 부르며, 국제거래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납니다.
쟁점 2. 에스크로 대행사의 의무 범위와 면책 조건
에스크로 대행사 C사가 캘리포니아 주법을 근거로 대금을 동결한 것은, 미국 에스크로 실무에서 흔히 적용되는 '이해관계인 청구(Interpleader)' 원리에 기반합니다. 이는 대행사가 상반되는 청구를 받았을 때 법원에 판단을 구하고 자신은 중립적 지위를 유지하는 절차입니다.
캘리포니아 주법상 에스크로 대행사의 핵심 의무
- 에스크로 지시서(Escrow Instructions)에 기재된 조건만을 기준으로 행동할 의무
- 분쟁 발생 시 당사자 일방의 지시만으로 대금을 지급하지 않을 의무
- 법원 명령이나 양 당사자의 합의가 있을 때까지 대금 보전 의무
문제는 한국법 관점에서 A사가 에스크로 대금 반환을 청구할 때, 캘리포니아 주법상의 면책 규정이 한국 법원에서도 인정될 수 있는지입니다. 한국 법원에 소를 제기하더라도, 에스크로 계약 자체의 준거법이 캘리포니아 주법이라면 대행사의 의무와 면책 범위는 해당 법에 따라 판단됩니다.
다만, 캘리포니아 주법의 적용 결과가 한국의 공서양속(국제사법 제10조)에 반하는 경우에는 적용이 배제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에스크로 대행사가 고의적 과실이나 사기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면서도 면책을 주장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쟁점 3. 복수 법원의 관할 충돌과 실무 대응
이 사례에서 A사는 한국 법원에, B사는 독일 법원에, C사는 캘리포니아 주 법원에 각각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이처럼 국제 에스크로 분쟁은 관할 충돌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유형 중 하나입니다.
1 본 계약 분쟁의 관할
A사와 B사 간 라이선스 계약 분쟁은 본 계약의 관할 조항에 따릅니다. 한국법이 준거법이고 한국 법원 관할로 합의했다면, 품질 하자 분쟁 자체는 한국 법원에서 다루어집니다.
2 에스크로 대금 분쟁의 관할
에스크로 계약에 별도 관할 합의가 없다면, 대금 보관지이자 대행사 소재지인 캘리포니아 법원이 관할권을 가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C사를 상대로 한 대금 지급 청구는 미국에서 진행해야 할 수 있습니다.
3 판결 집행 문제
한국 법원이 A사 승소 판결을 내리더라도, 에스크로 대금이 미국에 있으므로 해당 판결을 캘리포니아에서 승인 및 집행받아야 합니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상호 판결 승인 조약이 없어 민사소송법 제217조의 요건(상호보증 등)을 충족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할 분산은 시간과 비용을 크게 증가시킵니다. 실무에서는 본 계약과 에스크로 계약의 분쟁 해결 절차를 통일하거나, 국제중재(ICC, SIAC, HKIAC 등)를 단일 분쟁 해결 수단으로 지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예방책입니다.
실무적 조언
이 사례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실무적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에스크로 계약에 반드시 독립적인 준거법 조항을 두어야 합니다. 본 계약의 준거법과 동일하게 설정하든, 대행사 소재지법으로 하든, 당사자 간 명시적 합의가 있어야 불필요한 분쟁을 줄일 수 있습니다.
둘째, 에스크로 지시서(Escrow Instructions)에 대금 지급 조건, 반환 사유, 분쟁 시 처리 절차를 구체적으로 기재해야 합니다. 특히 '품질 하자'와 같은 주관적 조건은 객관적 검증 방법(제3자 감정, 인수 테스트 기준 등)을 함께 정해 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셋째, 본 계약과 에스크로 계약의 분쟁 해결 조항을 통일하는 것을 적극 검토해야 합니다. 국제중재를 단일 절차로 지정하면, 복수 법원 관할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고 뉴욕협약에 따라 160개 이상 체약국에서 중재판정을 집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넷째, 에스크로 대행사 선정 시 해당 대행사 소재지의 에스크로 관련 법령, 대행사의 면허 보유 여부, 보험 가입 여부를 사전에 확인해야 합니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금융보호혁신부(DFPI) 면허가 필요하며, 무면허 에스크로 대행사와의 거래는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렵습니다.
국제 에스크로 분쟁은 계약 체결 단계에서 준거법과 관할을 명확히 설정해 두면 대부분 예방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계약서 작성 단계에서 본 계약뿐 아니라 부수 계약의 준거법까지 빠짐없이 검토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리스크 관리 방법입니다.
김경숙 변호사의 코멘트
더감 법률사무소 · 경기도 수원시
국제 에스크로 분쟁을 다루면서 느낀 점은, 대부분의 문제가 계약서 작성 단계에서 에스크로 계약의 준거법을 누락한 데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본 계약서만 꼼꼼히 검토하고 에스크로 약정은 대행사 양식을 그대로 서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분쟁 발생 시 예상치 못한 외국법이 적용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사전에 전문가의 검토를 받으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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