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성인용품점의 여자모조성기 전시가 음란물건전시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무죄판결을 선구적으로 받아냈던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 주변 지인들의 관심과 문의가 많아 사건을 둘러싼 간략한 후기를 기억나는대로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사건의 요지
☐ 평생 별다른 전과 없이 살아온 평범한 주부인 피고인은 몇 년전 생계유지를 위해 남편과 성인용품점을 개업하였으나 ‘음란한 물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의 부재로 영업에 혼란을 느끼다 ‘음란물건전시죄’로 1차례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피고인은 (먹고살아야 하니까) 이후 더욱 당국의 시책을 예의주시하며 영업하였음에도 끝내 ‘음란물건전시죄’로 벌금 30만원의 약식명령을 발부받자 자신을 비롯한 성인용품업계의 향후 영업기준 마련을 위해 전격적으로 정식재판을 청구하였습니다.
☐ 모조성기가 음란물인지에 대해 당시의 대법원은 해당 물품이 형상과 색상 등에 있어서 성기를 얼마나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는바, 저는 변호인으로서 이 사건 ‘러브돌’이 여성성기를 간략히 형상화하였을 뿐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노골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여 무죄판결을 받아냄으로서 피고인의 억울함을 풀어줌과 동시에 성인용품업계에 하나의 영업기준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변론 전 문제상황
☐ 이 사건 ‘러브돌’이 과연 형법 제243조의 ‘음란한 물건’에 해당하는지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일응 추상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고, 하급심 판례는 해당 물품에 대한 검증 등을 통하여 제각각의 판결을 내리는 실정이어서 승소가능성에 대한 명확한 변론의 기준도 없이 무죄주장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 또한 변호인 선임 전에 피고인이 혼자 ‘공연한 전시가 아니’라면서 다투는 내용의 변론을 진행해 버린 터라, ‘음란성’ 외에 ‘공연전시’까지 다툴지, 다툰다면 변론의 우선순위를 둘지에 대한 입장도 정리하여야 했습니다.
☐ 아울러 피고인 스스로는 이미 동종전과가 있는 상태에서 또다시 처벌받을 경우 단속반의 집중단속대상이 되는데다가, 피고인을 비롯한 관내의 여러 성인용품업자들은 벌금의 액수를 떠나서 ‘음란물’의 기준조차 정확히 모른 채 향후 성인용품점을 운영하기에는 많은 위험부담이 따르는 대략난감한 처지였습니다.
고심에 찬 변론의 방향 설정
☐ 이 사건은 검찰과 피고인 모두 같은 취지의 대법원 판례에서 비롯된,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의 판례를 아전인수로 원용하는 가운데, 마땅한 증인도 없이(증인신문에 자신이 있는 변호인은 증인들을 싹 다 불러내서 반대신문해버리면 됩니다) 성범죄의 비범죄화에 대한 논리 및 해당 물품에 대한 청산유수와도 같은 변론만으로 판사의 심증을 형성해야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 변호인은 먼저 피고인이 변호인 선임 전에 강하게 주장했던 ‘공연전시의 점’에 대한 부인 부분은 뒤로 미루고, 이 사건 ‘러브돌’의 ‘음란성’만을 선결적으로 부인하는 방식으로 과감히 전환하였습니다. 애당초 음란한 물건이 아니라면 공연한 전시를 했는지는 더 따질 필요도 없으니까요.
구체적인 변론의 내용
☐ 변호인이 처음 참석한 제2회 공판기일에서 ‘음란성’만을 우선적으로 부인하자 재판부와 검찰 모두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었습니다.
참고로 피고인이 수사단계에서 제출한 동종업체(피고인 업체에 ‘러브돌’을 제작 및 공급한 업체)에 대한 무죄확정판결문을 검찰은 단순히 적용죄명이 다르다는 이유로 증거목록에서 제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변호인은 누락된 위 판결 외에도 같은 취지에서 성인용품업주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그 무렵 전국의 하급심 판례 및 성범죄의 비범죄화론이 담긴 장문의 변호인의견서를 강조하였습니다.
☐ 재판부는 즉각 검찰에 이 사건 ‘러브돌’의 검증을 위해 이를 법정에 제출할 것을 명했으나, 제3, 4회 기일이 지나도록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이를 미루던 검찰은 제4회 기일에 이르러 위 ‘러브돌’이 진작에 폐기되어 없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검찰이 추가입증을 전혀 못한 채 지지부진하는 동안 변호인은 피고인이 기존에 제출했던 무죄판결을 받은 동종업체와 피고인 업체 간의 거래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확보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즉 전시와 판매에 문제가 없는 러브돌을 제공받아서 전시했다는 취지입니다.
☐ 최후변론에서 변호인은, 음란물건전시죄의 보호법익이 건전한 성도덕을 지키고 공공의 성적 혐오감 내지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규율하는 것임데 비추어, 성인용품점으로 정당하게 사업자등록을 받은 업자가 업소 내에서 성인들에게 러브돌을 전시 판매하는 것을 형사처벌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냐는 논의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고, 최근 판례의 경향은 구체적 타당성을 고려하여 해당 물품이 여성의 음부를 재현함에 있어서 음부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는지 간략히 형상화하였는지 등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바, 이 사건 ‘러브돌’은 노골적 묘사 없이 기능에 충실한 물품에 불과하므로 판례 기준에 따를 때 음란성이 없어 무죄가 선고되어야 함을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무죄판결 확정과 변론의 성공 요인
☐ 검찰은 약식명령과 동일하게 벌금 30만원을 구형하였으나, 벌금의 액수를 떠나 피고인 및 이를 지켜보던 동종업자들에게는 검사의 구형이 천근만근과 같은 무게로 다가왔고, 재판부는 결국 변호인의 주장내용 대부분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검찰의 항소와 상고에도 불구하고 무죄이유를 번복할 추가 법리로 설득하기 어려운 사안이었으므로 무죄는 그대로 확정되었습니다.
☐ 피고인은 ‘성인용품점 업주’라는 평범하지 않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법원, 검찰 및 해당 관청의 들쑥날쑥한 기준에 절절 매면서 죄 지은 것처럼 눈치보며 장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평범한 소상공인이자 생활인일 뿐이었습니다.
☐ 흔히들 형사변호의 꽃은 증인에 대한 반대신문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건을 통해 모처럼 미국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으로 재판부와 검찰 앞에서 헌법상의 추상적 담론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저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고시생 시절에 시험에 나올 일이 없어 호치켓스로 박아 놓았던 임웅 교수님의 형법각론 중 ‘성범죄의 비범죄화론’ 코너를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출제가 많이 되는 사기죄 파트는 교과서가 너덜너덜한 반면 제가 거의 읽은 적이 없는 비범죄화론 파트는 아주 깨끗한게 보였습니다.
포스팅을 마치며
좋은 변호사가 되기 위하여는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대한 다툼 못지 않게 다양한 헌법이념과 그로부터 파생된 가치들에 대한 균형감각이 항상 요구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었던 사안으로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입니다.
여러분들 중 상식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법령과 판례에 따라 수사나 재판을 받으며 고통받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이 사건처럼 헌법상 가치로부터 시작한 질높은 변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존경하는 임웅 교수님의 탁월한 형법총론, 형법각론 시리즈와 이를 관통하는 비범죄화론의 우수성과 선견지명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시생 시절을 회상하며 따로 나눌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형법총각론을 이재상 저가 아닌 임웅 저로 1차 객관식, 2차 주관식 모두 대비하였고, 이에 대한 자부심이 지금도 매우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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