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해 용기를 내 회사에 알렸는데, 정작 회사는 "둘이 알아서 풀라"거나 "조용히 넘어가자"며 아무런 조사도, 가해자에 대한 조치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를 오히려 한직으로 발령 내거나 눈치를 주어 스스로 그만두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 많은 분들이 "가해자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지만, 회사가 성희롱을 방치하거나 잘못 대응한 것 자체가 별도의 책임이 됩니다. 문제는 회사의 책임이 어디까지 인정되는지, 그리고 그 책임을 묻기 위해 무엇을 남겨두어야 하는지가 사안마다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먼저 전체를 짚어보겠습니다: 가해자 개인 책임과 별개로 움직이는 회사의 두 갈래 책임
직장 내 성희롱이 있으면 우선 행위자 개인이 민법 제750조에 따른 불법행위 책임을 집니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고, 행위 내용에 따라 강제추행 등 형사책임이 별도로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상담에서 피해자가 가장 답답해하는 대목은 가해자 개인이 아니라, 그 상황을 알고도 손을 놓은 회사입니다.
회사(사업주)의 책임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가해자의 성희롱 그 자체에 대해 회사가 함께 지는 사용자책임(민법 제756조)이고, 다른 하나는 회사가 성희롱 발생 이후 마땅히 해야 할 조사·보호·징계를 게을리하거나 오히려 피해자를 불리하게 대한 데 대한 회사 자신의 독자적인 불법행위 책임입니다. 이 두 번째 책임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이 사업주에게 부과한 의무를 어긴 것이어서, 가해자와의 관계와는 별개로 성립합니다.
즉 "방치"는 단순한 도의적 문제가 아니라, 법이 사업주에게 지운 조사·보호·징계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어느 갈래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는 성희롱이 업무와 얼마나 맞닿아 있었는지, 회사가 신고를 받고 어떻게 움직였는지에 따라 갈립니다.
법은 이렇게 판단합니다: 사용자책임의 인정 범위와 조치의무 위반이라는 독자 책임
먼저 사용자책임입니다. 민법 제756조는 피용자가 "사무집행에 관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 사용자가 함께 배상하도록 정합니다. 대법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인 대법원 1998. 2. 10. 선고 95다39533 판결에서, 여기서 말하는 "사무집행에 관하여"란 피용자의 행위가 외형상 객관적으로 사용자의 사업활동이나 사무집행 또는 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경우를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와 무관하게, 본래 직무와 성희롱의 관련 정도, 그리고 사용자가 위험을 만들어 내고 이를 막을 조치를 갖추지 못한 책임이 어느 정도인지를 함께 따진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사용자책임의 인정 범위와 동시에 한계를 보여 줍니다. 같은 판결에서 대법원은, 문제 된 성희롱이 은밀하고 개인적으로 이루어져 사용자가 이를 알거나 알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사안이라면 사용자책임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회식·출장·좁은 업무공간처럼 업무 수행과 밀접하게 얽힌 상황에서 벌어졌거나, 상급자라는 지위를 이용한 경우, 또는 회사가 이미 낌새를 알고도 방치한 경우일수록 사용자책임이 인정될 여지가 커집니다.
성희롱 자체의 위법성은 어떻게 가릴까요. 위 판결은 성적 언동의 위법성을 당사자의 연령과 관계, 행위가 있었던 장소와 상황, 성적 동기나 의도의 유무, 상대방의 명시적·추정적 반응, 행위의 내용과 정도, 그것이 일회적인지 계속적인지 등 구체적 사정을 종합해 판단한다고 정리했습니다. 한 번의 심한 언동만으로도, 혹은 개별적으로는 가벼워 보이는 언동이 반복된 경우에도 위법성이 인정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은 회사 자신의 조치의무입니다.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는 사업주가 성희롱 신고를 받거나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지체 없이 조사하고(제2항), 조사 기간 중 피해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근무장소 변경·유급휴가 등 조치를 하며(제3항), 성희롱이 확인되면 피해자가 요청할 때 근무장소 변경·배치전환 등 적절한 조치를 하고(제4항), 가해자에 대해서는 지체 없이 징계 등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제5항) 정합니다. 그리고 신고자와 피해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제6항).
이 의무를 어기면 회사는 가해자와 별개로 스스로 불법행위 책임을 집니다. 대법원 2017. 12. 22. 선고 2016다202947 판결은, 사업주가 피해근로자나 그를 도와준 동료에게 불리한 조치를 한 경우 이는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를 위반한 것으로서 민법 제750조의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나아가 사업주에게는 성희롱 발생 시 신속하고 적절한 근로환경 개선책을 실시하고 피해자가 후속 피해를 입지 않도록 근로여건을 조성해 인격을 존중·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분쟁이 생기면 그 불리한 조치가 성희롱과 무관하거나 정당한 사유가 있다는 점을 사업주가 증명해야 한다고 보아, 피해자의 입증 부담을 크게 덜어 주었습니다.
가해자를 감싸는 방식의 방치도 회사 책임으로 이어집니다. 대법원 2024. 11. 14. 선고 2023다276823 판결은, 가해자에 대해 제대로 된 징계 없이 사직 처리하는 데 그친 회사에 대해,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 제5항의 "징계 등 필요한 조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보아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사용자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본인이 그만뒀으니 됐다"는 식의 처리는 법이 요구하는 조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방 단계의 의무도 함께 작동합니다. 남녀고용평등법 제13조는 사업주에게 매년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도록 하고, 취업규칙 등에 처리 절차를 마련하고 신고 창구를 운영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예방조치를 갖추었는지는 사용자책임에서 말하는 "위험 방지조치를 결여했는지"와 곧바로 연결됩니다. 예방교육과 처리 절차를 형식적으로도 두지 않은 회사는 방지조치 결여가 인정되기 쉽고, 그만큼 책임이 무거워집니다. 반대로 예방·대응 체계를 실질적으로 갖춘 회사는 책임의 폭이 좁아질 수 있습니다.
위반에는 제재도 따릅니다. 신고자·피해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한 사업주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고, 조사 의무나 예방교육 의무 등을 이행하지 않은 사업주에게는 과태료(최대 500만 원)가 부과됩니다. 형사처벌·과태료는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과 별개로 진행됩니다.
김상훈 변호사의 대응, 이렇게: 신고 기록 확보부터 노동위원회 시정신청과 손해배상까지
쟁점이 정리됐다면, 실제로는 다음 순서로 대응합니다.
증거를 세 층으로 나눠 확보 — 성희롱 자체(문자·메신저·통화 녹음·목격자 진술·병원 진료 기록), 회사에 신고한 사실과 시점, 그리고 회사가 조사·조치를 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불리하게 대한 정황을 각각 남깁니다. 회사 책임을 묻는 사안에서는 두 번째·세 번째 층, 즉 "언제 알렸는데 회사가 무엇을 안 했는가"가 승패를 가릅니다.
회사에 서면으로 공식 신고 — 구두나 상사와의 사담만으로는 나중에 회사가 "제대로 신고받은 적 없다"고 발뺌하기 쉽습니다. 성희롱 사실과 요청 사항(조사·분리·보호조치)을 적어 이메일이나 내용증명으로 보내 두면,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 제2항의 조사 의무가 시작되는 시점이 명확해지고 이후 방치를 다툴 근거가 됩니다.
회사가 방치하거나 불리하게 대하면 노동위원회 시정신청 — 남녀고용평등법 제26조는 피해자 보호조치를 하지 않거나 피해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한 경우 노동위원회에 시정을 신청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불리한 처우 등을 받은 날부터 6개월이 지나면 신청할 수 없으므로 기간 관리가 중요합니다.
고용노동부 진정과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병행 — 조사·예방교육 등 의무 위반은 고용노동부에 진정·신고해 과태료 부과와 시정을 이끌어 낼 수 있고, 성희롱 자체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해 조사·권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 창구는 배타적이지 않아 사안에 맞게 병행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와 회사를 함께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 가해자에게는 민법 제750조로, 회사에는 사용자책임(민법 제756조) 또는 조치의무 위반에 따른 불법행위(민법 제750조)로 위자료를 청구하며, 하나의 소송에 함께 담을 수 있습니다. 특히 회사의 방치·2차 가해가 뚜렷한 사안일수록, 불리한 조치가 정당했다는 점을 회사가 증명하도록 한 판례 덕분에 피해자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멸시효 관리 —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권은 손해와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불법행위가 있은 날부터 10년 안에 행사해야 합니다(민법 제766조). 회사와의 다툼이 길어질수록 증거가 흐려지므로, 시효와 별개로 초기에 자료를 확보해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망설이는 사이, 시간은 불리해집니다: 회사에 신고한 시점과 증거가 책임 인정을 가릅니다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서 가장 아쉬운 경우는, 회사에 제대로 알리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 "언제 무엇을 요청했는데 회사가 이를 방치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입니다. 회사 책임의 인정 범위는 결국 신고 시점과 그때 남긴 기록에서 갈립니다.
성희롱을 겪고 회사의 대응이 미덥지 않다면, 신고 사실을 서면으로 남기는 것부터 시작해 노동위원회 시정신청과 손해배상까지 염두에 둔 대응 순서를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률 문제는 초기 대응이 중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김상훈 변호사에게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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