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재판에서 피해자 증인신문은 유무죄를 사실상 결정하는 하루입니다. 이 글은 혐의를 다투는 피고인이 그 하루 전후로 마주하는 다섯 갈림길(증거 동의 여부, 증인 불출석, 반대신문의 범위, 퇴정·차폐 요구, 증인신문 뒤의 입장 정리)을 조건별로 안내합니다.
성범죄 사건은 대부분 두 사람만 있던 자리에서 벌어집니다. CCTV도, 제3의 목격자도 없는 경우가 많아 결국 피해자의 진술이 얼마나 믿을 만한가가 재판의 전부가 되곤 합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 증언하는 증인신문 기일은, 피고인 입장에서 '내 말을 들어주는 날'이 아니라 '상대 진술이 시험대에 오르는 날'입니다. 그날 무엇을 할지, 그 전에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는 미리 설계해 두어야 합니다.
갈림길 1. 피해자 진술조서, 동의할까 부동의할까
사실관계를 다투는 사건이라면 피해자 진술조서와 영상녹화물에 증거 부동의를 하는 것이 원칙이고, 그래야 피해자 증인신문이 열립니다. 반대로 행위 자체를 인정하고 양형만 다투는 사건에서는 부동의가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습니다.
첫 공판기일에 재판부는 검사가 낸 증거목록을 하나씩 짚으며 피고인 측 의견을 묻습니다. 여기서 '동의'라고 답하면 피해자가 경찰·검찰에서 한 진술이 그대로 증거가 되고, 피해자는 법정에 나오지 않습니다.
형사소송법 제318조(당사자의 동의와 증거능력) 제1항 검사와 피고인이 증거로 할 수 있음을 동의한 서류 또는 물건은 진정한 것으로 인정한 때에는 증거로 할 수 있다.
부동의하면 검사는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청하고, 피해자가 법정에서 그 조서가 자기 진술대로 작성되었음을 확인하고 피고인 측의 신문을 받아야 비로소 조서가 증거능력을 얻습니다. 이것이 증인신문 기일이 열리는 법적 이유입니다.
형사소송법 제312조(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의 조서 등) 제4항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이 피고인이 아닌 자의 진술을 기재한 조서는 적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서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그 원진술자의 진술에 의하여 성립의 진정함이 증명되고, 피고인 또는 변호인이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그 기재 내용에 관하여 원진술자를 신문할 수 있었던 때에 한하여 증거로 할 수 있다. (이하 생략)
이런 조건이면 부동의
행위가 없었다거나, 있었더라도 동의 하에 이루어졌다고 다투는 경우
피해자가 경찰·검찰에서 한 진술이 조사 단계마다 바뀌었거나, 카톡·CCTV·동선 기록 같은 객관 자료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는 경우
신고 경위나 동기에 합리적 의문이 있어 법정에서 직접 확인할 가치가 있는 경우
이런 조건이면 동의도 고려
행위를 인정하고 합의·반성·양형으로 승부하는 사건. 이때 부동의로 피해자를 굳이 법정에 세우면 "반성하지 않는다", "피해자를 두 번 괴롭혔다"는 평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부동의하더라도 다투고 싶은 부분이 조서의 일부라면, '일부 부동의'로 범위를 좁히는 방법도 있습니다.
영상녹화물에는 특례가 있습니다. 성폭력처벌법은 19세 미만이거나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피해자의 진술을 영상으로 보존하도록 하고, 일정한 요건 아래 그 영상물 자체에 증거능력을 인정합니다.
과거에는 조사 과정에 동석한 사람이 영상 내용을 확인해 주기만 하면 피고인이 피해자를 한 번도 신문하지 못한 채 유죄가 가능했지만, 헌법재판소는 이것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침해한다고 보았습니다. 이후 법이 바뀌어, 지금은 피고인 측에 반대신문 기회가 보장되었거나 피해자가 사망·질병·소재불명 등으로 진술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야 영상물이 증거가 됩니다. 미성년 피해자 사건이라면 공판 전 증거보전 절차에서 신문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그 단계가 사실상의 증인신문임을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갈림길 2. 피해자가 법정에 안 나오면 유리한가
피해자가 소환에 불응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무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재판부는 소환을 반복하고 과태료·구인까지 할 수 있으며, 끝내 출석이 불가능하면 특별한 요건 아래 조서가 그대로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증인은 정당한 사유 없이 불출석하면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 반복하면 7일 이내의 감치 결정을 받을 수 있고, 구인될 수도 있습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이런 조치가 실제로 내려지는 일은 드물지만, 재판부가 두세 차례 소환장을 보내며 기일을 미루는 경우는 흔합니다. 이 기간 동안 구속 상태라면 피고인에게는 큰 부담입니다.
형사소송법 제314조(증거능력에 대한 예외) 제312조 또는 제313조의 경우에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진술을 요하는 자가 사망·질병·외국거주·소재불명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사유로 인하여 진술할 수 없는 때에는 그 조서 및 그 밖의 서류를 증거로 할 수 있다. 다만, 그 진술 또는 작성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 하에서 행하여졌음이 증명된 때에 한한다.
대법원은 이 예외를 엄격하게 봅니다. 단순히 증인이 몇 번 나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소재불명에 준하는 사유'가 되지 않고, 법원이 소재 파악을 위해 가능한 조치를 다했는데도 출석시킬 수 없었음이 확인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도 검사가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이 갈림길에서 피고인 측이 할 일
불출석이 반복되면 제314조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의견서를 미리 내 두어, 재판부가 조서를 손쉽게 증거로 채택하지 않도록 합니다.
피해자에게 직접이든 지인을 통해서든 "나오지 말아 달라"는 취지의 연락을 하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보복 목적의 협박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별도 범죄가 되고, 그 정도가 아니어도 증인에 대한 접촉 자체가 구속 사유와 양형 가중 사유가 됩니다.
증인이 출석했으나 정당한 이유 없이 반대신문에 답하지 않고 퇴정해 버린 경우, 대법원은 반대신문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주신문 진술은 원칙적으로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봅니다. 이런 상황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조서에 남기도록 변호인이 이의를 제기해야 합니다.
갈림길 3. 반대신문, 무엇을 묻고 무엇을 묻지 않을까
반대신문의 목적은 피해자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재판부가 피해자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느낄 '구체적인 지점'을 기록에 남기는 것입니다. 효과 있는 질문은 세 축(객관 자료와의 모순, 진술의 변천, 신고 경위)에 집중되고, 효과 없는 질문은 대개 '피해자다움'을 따지는 질문입니다.
증인신문은 검사의 주신문, 피고인 측의 반대신문, 다시 검사의 재주신문 순서로 진행되고 마지막에 재판장이 직접 묻습니다. 주신문에서는 답을 유도하는 질문이 금지되지만, 반대신문에서는 유도신문이 허용됩니다. "그날 밤 11시 40분에 피고인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낸 것은 증인이죠?"처럼 답이 예·아니오로 떨어지는 질문이 반대신문의 기본형인 이유입니다.
물어야 할 것
객관 자료와의 모순. 카카오톡 대화, 통화 기록, 결제 내역, 택시 호출 기록, 건물 출입 기록처럼 피해자 진술과 시간·장소·순서가 맞지 않는 부분을 자료를 보여주며 하나씩 확인합니다. 피해자가 "기억이 안 난다"고 답해도 그 자체가 기록에 남습니다.
진술의 변천. 경찰 1회 조사, 2회 조사, 검찰 조사, 법정 진술 사이에 핵심 사실(행위의 내용, 거부 의사 표시의 방식, 당시 의식 상태)이 달라졌다면 각 조서의 쪽수를 짚어 가며 왜 달라졌는지 묻습니다. 대법원은 사소한 기억의 차이는 신빙성을 흔들지 않는다고 보지만, 범행의 핵심 부분이 조사 단계마다 바뀐 경우는 다르게 평가합니다.
신고에 이르게 된 경위. 사건 직후가 아니라 상당 기간이 지난 뒤 신고했다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와 상의했는지, 금전 요구나 다른 분쟁이 있었는지를 담담하게 확인합니다. 지연 신고 자체가 거짓의 근거는 아니지만, 그 경위에 다른 동기가 드러나면 재판부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묻지 말아야 할 것
옷차림, 과거 연애·성 경험, 평소 행실을 따지는 질문. 형사소송규칙은 위협적이거나 모욕적인 신문을 금지하고, 재판장은 이런 질문을 즉시 제한합니다. 재판부의 반감만 사고 양형에서도 "2차 가해"로 평가됩니다.
"왜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았나", "왜 바로 도망가지 않았나" 같은 피해자다움 추궁. 대법원은 성범죄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피해자가 보일 것으로 기대되는 전형적 반응이 없었다는 이유로 진술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이 질문은 피고인에게 득이 없습니다.
같은 질문을 표현만 바꿔 반복하기. 중복 신문은 제한되고, 증인이 같은 답을 여러 번 하게 만들면 오히려 진술의 일관성을 강조해 주는 결과가 됩니다.
피고인이 직접 묻겠다고 나서는 것. 피고인에게도 신문권은 있지만, 감정이 섞이면 질문이 아니라 항변이 되고, 재판장에게 저지당하는 장면만 남습니다.
준비 단계에서 변호인은 증거기록 열람·등사를 통해 피해자 진술조서 전부를 확보하고, 조서별로 진술 대조표를 만들어 둡니다. 반대신문 질문지는 20개 안팎으로 압축하고, 각 질문마다 "예"라고 답할 때와 "아니오"라고 답할 때 다음 질문을 미리 정해 둡니다. 증인이 예상과 다르게 답하면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파고들기보다, 모순을 짚는 한 문장을 남기고 넘어가는 편이 안전합니다.
갈림길 4. 피고인 퇴정·차폐막·비공개 요구, 거부해야 할까
피해자가 피고인과 마주 보지 않고 증언하게 해 달라는 요청은 재판장이 결정할 사항이고, 피고인이 거부해서 얻을 실익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퇴정 중 진술 요지를 고지받고 변호인을 통해 추가 신문을 요구하는 권리를 챙겨야 합니다.
형사소송법 제297조(피고인등의 퇴정) 제1항 재판장은 증인 또는 감정인이 피고인 또는 어떤 재정인의 면전에서 충분한 진술을 할 수 없다고 인정한 때에는 그를 퇴정하게 하고 진술하게 할 수 있다. 피고인이 다른 피고인의 면전에서 충분한 진술을 할 수 없다고 인정한 때에도 같다.
성폭력 사건에서는 이보다 더 다양한 장치가 쓰입니다. 피해자가 법정이 아닌 별도 공간에서 비디오 중계로 증언하는 방식, 법정 안에 차폐막을 설치하는 방식, 심리 자체를 비공개로 진행하는 방식, 신뢰관계인이나 진술조력인이 동석하는 방식이 모두 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피해자 측 변호사가 공판에 출석해 의견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퇴정 명령이 나왔을 때 챙길 것
퇴정 중 이루어진 증언의 요지를 고지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재판장이 생략하고 넘어가면 변호인이 요구해야 합니다.
요지를 듣고 추가로 확인하고 싶은 점이 생기면, 변호인을 통해 보충 신문을 신청합니다. 피고인은 법정 밖에서 변호인과 짧게 상의할 시간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차폐막이나 중계 신문은 피고인이 증인의 표정과 태도를 볼 수 없게 하지만, 변호인은 볼 수 있습니다. 증인이 특정 질문에서 오래 침묵했거나 메모를 봤다면 변호인이 조서에 남기도록 요청합니다.
퇴정 요청 자체에 "나는 떳떳하니 마주 보고 하겠다"며 반발하는 피고인이 있습니다. 재판부가 보기에 이것은 떳떳함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위협으로 읽힙니다. 거부 의사는 법정이 아니라 변호인과의 상담에서 꺼내고, 법정에서는 조용히 따르는 것이 맞습니다.
갈림길 5. 증인신문이 끝난 뒤, 입장을 바꿀까 유지할까
증인신문 결과를 보고 그제서야 부인에서 인정으로, 또는 인정에서 부인으로 입장을 바꾸는 것은 신빙성 면에서 가장 큰 손실입니다. 입장은 증인신문 전에 확정하고, 신문 뒤에는 그 입장 안에서 양형 자료를 보완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증인신문 다음 기일에는 보통 피고인신문이 이어집니다. 검사는 피해자 증언 가운데 피고인 측이 흔들지 못한 부분을 그대로 피고인에게 묻습니다. 여기서 피고인이 "사실은 그 부분은 맞다"고 물러서면, 재판부는 "그동안 거짓말을 했다"고 받아들이고 나머지 부인 부분까지 믿지 않게 됩니다.
조건별 정리
반대신문에서 핵심 모순이 드러났다면 그 모순을 변론요지서에서 객관 자료와 함께 정리하고, 피고인신문에서는 같은 사실관계를 흔들림 없이 반복합니다. 새로운 주장을 추가하지 않습니다.
피해자 진술이 일관되고 흔들리지 않았다면 변호인과 다시 사건을 평가할 시점입니다. 다만 입장 변경은 다음 기일 전에 재판부에 서면으로 알리고, 변경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법정에서 즉석으로 바꾸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동의 여부가 쟁점인 사건에서는 "행위는 있었지만 동의가 있었다"는 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해야 합니다. 행위 자체를 부인하다가 증인신문 뒤 동의 주장으로 돌아서는 사건이 가장 결과가 나쁩니다.
이 시점에 합의를 시도하려는 분들도 많습니다. 증인신문 뒤의 합의 시도는 그 자체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피고인이나 가족이 피해자에게 직접 연락하면 안 되고 반드시 변호인을 통해 피해자 측 변호사와 접촉해야 합니다. 피해자가 거부하면 형사공탁 제도를 검토하되, 공탁 사실이 곧 감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피해자가 수령을 거부한 사정도 함께 고려된다는 점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
증인신문 기일, 숫자로 기억할 것
증인신문과 관련해 자주 묻는 수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증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불출석하면 500만 원 이하 과태료, 반복 시 7일 이내 감치가 가능합니다.
법정에서 선서한 증인이 허위 진술을 하면 형법상 위증죄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다만 피고인이 증인신문 뒤 곧바로 피해자를 위증으로 고소하는 것은 대부분 무고 또는 2차 가해로 평가될 위험이 크므로, 판결 확정 이후 변호인과 신중하게 판단할 문제입니다.
성폭력처벌법은 19세 미만 또는 장애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피해자의 진술을 영상으로 보존하도록 하고, 그 피해자에 대해서는 공판 전 증거보전 신문, 중계장치 신문, 진술조력인 참여 같은 절차를 따로 두고 있습니다.
증인신문 기일은 통상 1회로 끝나고, 반대신문 시간은 길어야 한두 시간입니다. 수개월 걸린 수사와 재판의 결론이 그 시간 안에서 상당 부분 정해집니다.
정리하면, 성범죄 재판의 피해자 증인신문은 피고인이 '이기는' 자리가 아니라 '잃지 않는' 자리입니다. 증거 부동의 여부를 사건 성격에 맞게 정하고, 반대신문은 객관 자료·진술 변천·신고 경위라는 세 축에 집중하며, 재판부의 피해자 보호 조치에는 따르되 피고인의 절차적 권리는 빠짐없이 챙기는 것.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입장을 즉석에서 바꾸지 않는 것. 이 네 가지가 그날을 준비하는 뼈대입니다.
※ 본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구체적인 법률 조언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 개인의 상황에 맞는 정확한 법률 자문은 반드시 전문 변호사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 본문의 사례는 판례의 취지를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한 것으로,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대응 방법 및 결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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