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을 먼저 이행하기로 정해져 있는데, 상대방의 사업이 흔들리거나 재정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불안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계약서대로라면 돈을 먼저 지급하거나 물건을 먼저 넘겨야 하는데, 정작 상대방이 나중에 자기 몫을 이행하지 못할 것 같다면 예정대로 선이행의무를 그대로 이행해야만 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민법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선이행의무자가 예외적으로 이행을 미룰 수 있는 불안의 항변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무 때나 '상대방이 못 미더워서'라는 막연한 이유만으로 이행을 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법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이 글에서는 불안의 항변권이 인정되는 요건과 실제 적용된 사건, 그리고 이를 행사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불안의 항변권이란 — 선이행의무자에게 예외적으로 인정되는 이행거절권
쌍무계약에서는 원칙적으로 당사자 쌍방이 각자의 채무를 동시에 이행하면 되고, 이를 동시이행의 항변권(민법 제536조 제1항)이라고 부릅니다. 상대방이 자기 몫을 이행하지 않는 한 나도 이행을 거절할 수 있으니, 서로 손해를 볼 위험이 균형 있게 배분되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계약에서 한쪽이 먼저 이행하기로 정한 선이행의무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선이행의무자는 원칙적으로 상대방이 아직 자기 채무의 이행기에 이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는 이행을 거절할 수 없고, 계약서에 정한 순서대로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문제는 이 원칙을 예외 없이 관철하면 불합리한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계약을 맺은 뒤 상대방의 재정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져, 자신이 먼저 이행하더라도 상대방으로부터 반대급부를 받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 상황에서도 선이행의무자는 계약서 문구만 믿고 먼저 이행부터 해야 하는 셈이 됩니다. 민법 제536조 제2항은 이런 불합리를 막기 위해 불안의 항변권을 인정합니다. 대법원 2022. 5. 13. 선고 2019다215791 판결은 이를 "선이행채무를 지고 있는 당사자가 계약 성립 후 상대방의 신용불안이나 재산상태 악화 등과 같은 사정으로 상대방의 이행을 받을 수 없는 사정변경이 생기고, 이로 말미암아 당초의 계약 내용에 따른 선이행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것이 공평과 신의칙에 반하게 되는 경우"로 정의하며, 상대방의 채무가 아직 이행기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이행기에 실제로 이행될 것인지가 현저히 불확실해졌다면 이행이 확실해질 때까지 선이행의무의 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고 판시했습니다.
쌍무계약상 대가적 채무이거나 적어도 밀접한 견련관계가 있는 채무일 것
그중 일방의 채무가 먼저 이행해야 하는 선이행관계에 있을 것
계약 성립 후 상대방의 이행이 곤란해질 현저한 사유가 발생했을 것
불안의 항변권은 선이행의무자에게 무제한의 이행거절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행이 현저히 불확실해진 예외적 상황에서만 인정되는 한시적 방어 수단이다.
상대방 신용이 흔들린다는 것 — '이행 곤란한 현저한 사유'의 판단기준
불안의 항변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는 결국 '현저한 사유'가 있는지에 달려 있는데, 이 기준은 막연한 불안감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사정이어야 합니다. 대법원 2019다215791 판결도 이런 사유가 있는지는 당사자 쌍방의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단순히 "요즘 그 회사 힘들다더라"는 식의 소문이나 막연한 추측만으로는 부족하고, 상대방의 이행 가능성이 실제로 떨어졌다는 것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실무에서 현저한 사유로 인정되는 전형적인 사례로는 상대방의 어음·수표 부도, 회생절차나 파산절차 개시신청,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이나 가압류·가처분, 사업장 폐업, 신용평가등급의 급격한 하락, 주요 재산의 급박한 처분이나 은닉 정황 등이 있습니다. 부동산 거래라면 매도인이 잔금을 받기 전 목적물에 새로운 근저당이나 가압류가 설정되었거나, 제3자에게 이중으로 처분한 정황이 드러난 경우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단순히 상대방 회사의 매출이 예년보다 줄었다거나, 경기가 어렵다는 일반적인 사정만으로는 현저한 사유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어음·수표 부도, 당좌거래 정지 처분
회생절차·파산절차 개시신청 또는 개시결정
상대방 재산에 대한 압류·가압류·가처분 결정
폐업신고, 주요 재산의 급박한 처분·은닉 정황
부동산 매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함정 — 계약갱신요구권이 잔금거절 사유가 된 사건
불안의 항변권이 신용불안뿐 아니라 상대방의 이행능력 자체가 흔들린 경우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대법원 2023. 12. 7. 선고 2023다269139 판결입니다. 이 사건은 매매계약 체결 당시 아파트에 거주 중이던 임차인이 임대차기간 만료 후 갱신요구권을 행사하지 않고 집을 비워주겠다고 했다가, 매수인의 잔금 지급일 직전에 갑자기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해 2년 더 거주하겠다고 통보한 사안입니다. 매수인은 실거주 목적으로 매매계약을 체결한 상황이었는데, 매도인이 임차인을 내보내지 못하게 되면서 계약대로 현실인도를 받을 수 없게 된 매수인이 잔금 지급을 거절했습니다.
대법원은 매도인의 현실인도의무 이행이 곤란해질 현저한 사정변경이 생겼다고 보아, 매수인의 잔금 지급의무 이행거절이 정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매매대금 지급의무와 소유권이전·인도의무는 서로 대가관계에 있는 채무이고, 매수인의 잔금 지급이 선이행관계에 있었던 이 사건에서, 매도인 쪽 사정으로 인도의무 이행이 불투명해진 이상 매수인에게 잔금부터 먼저 내라고 강요하는 것은 공평에 반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 판결은 불안의 항변권이 상대방의 재무 상태가 나빠진 경우뿐 아니라, 계약 이행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제3자의 개입이나 법적 상황 변화가 생긴 경우에도 폭넓게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법리는 부동산 매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물품 공급계약에서 선급금을 지급해야 하는 발주자가, 공급자의 생산설비에 압류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우나, 용역계약에서 착수금을 먼저 지급해야 하는 의뢰인이 수임인 쪽에 소송이나 형사절차가 걸려 업무 수행 자체가 불가능해질 상황임을 확인한 경우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핵심은 계약의 종류가 아니라, 선이행의무자가 먼저 이행하더라도 반대급부를 받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객관적 사정이 있는지입니다.
불안의 항변권은 상대방의 재산 상태 악화뿐 아니라, 계약 이행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법적·사실적 사정변경이 생긴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행거절과 계약해제는 다르다 — 어디까지 정당한가
불안의 항변권을 행사할 때 흔히 하는 오해는 이를 계약해제와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의 항변권은 어디까지나 이행을 일시적으로 미룰 수 있는 권리일 뿐, 그 자체로 계약을 끝낼 수 있는 권리는 아닙니다. 상대방이 담보를 제공하거나 이행 가능성을 회복하면 항변권은 소멸하고 선이행의무자는 다시 이행할 의무를 부담합니다. 계약을 완전히 종료시키려면 별도로 이행최고와 상당한 기간 경과 등 계약해제의 요건을 갖추어야 하고, 단순히 불안하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해제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불안의 항변권 행사가 지나치게 성급했던 경우에는, 오히려 이행을 거절한 쪽이 채무불이행 책임을 지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현저한 사유 없이 막연한 불안감만으로 이행을 미루다가 이행지체에 빠지면, 상대방이 상당한 기간을 정해 이행을 최고한 뒤 계약을 해제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해 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항변권을 행사하기 전에 자신이 내세우는 사유가 앞서 설명한 '현저한 사유'의 요건을 실제로 충족하는지 신중하게 따져봐야 하고, 근거가 불충분하다면 이행을 거절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담보 제공이나 이행 확약을 먼저 요구하는 방법을 검토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항변권을 소멸시키는 방법 — 담보 제공과 이행 확실성 회복
불안의 항변권은 상대방의 이행 가능성이 회복되면 자동으로 소멸하는 한시적 권리입니다. 상대방이 채무 이행에 상응하는 담보를 제공하거나, 재산상태 악화의 원인이 해소되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면 선이행의무자는 더 이상 이행을 거절할 수 없고, 지체 없이 자신의 선이행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담보의 형태는 반드시 저당권이나 질권처럼 정형화된 물적 담보일 필요는 없고, 연대보증인을 세우거나 대금을 에스크로 계좌에 예치하는 방식, 이행보증보험증권을 제공하는 방식도 실무에서 활용됩니다.
이 지점에서 선이행의무자가 유의할 점은, 상대방이 제공한 담보나 확약이 애초에 우려했던 위험을 실질적으로 커버하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만 담보를 제공했을 뿐 실제 자력이 없는 보증인을 세우거나, 압류가 이미 걸려 있는 재산을 담보로 제시하는 경우처럼 실질이 없는 조치라면 여전히 이행 곤란의 현저한 사유가 해소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담보의 실효성에 대한 자료를 별도로 확인한 뒤에 이행 재개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불안의 항변권을 행사할 때 갖춰야 할 증거
불안의 항변권은 나중에 상대방이 이행지체나 채무불이행을 주장하며 다투어 올 가능성이 큰 만큼, 행사 시점부터 근거를 문서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이행을 거절하겠다는 의사와 그 사유는 구두로 전달하기보다 내용증명우편으로 명확히 통지해 두는 것이 이후 분쟁에서 유리합니다. 사유가 되는 사정도 소문이나 전언이 아니라 등기부등본, 신용정보 조회 결과, 압류·가압류 결정문, 회생·파산절차 개시신청서나 개시결정문, 폐업신고 확인서류처럼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자료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부동산 거래라면 계약체결 이후 최신 등기부등본을 발급받아 근저당이나 가압류 설정 여부를 확인하고, 상대방이 임차인 문제나 소유권 분쟁에 휘말렸는지도 함께 점검해야 합니다. 기업 간 거래라면 상대방의 신용평가보고서, 어음교환소의 부도 확인, 공시된 재무제표의 변동 추이 등을 자료로 확보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자료 없이 막연히 "불안해서 못 주겠다"는 식으로만 대응하면, 추후 소송에서 항변권 행사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행거절 의사와 사유를 담은 내용증명우편 발송·보관
등기부등본, 신용정보, 압류·가압류 결정문 등 객관적 자료 확보
회생·파산 개시신청서, 폐업신고 확인서류 등 절차 관련 자료 수집
상대방의 담보 제공·이행 확약이 있었다면 그 경과와 실효성까지 기록
계약서에 기한이익 상실 조항이 있다면 — 제536조 제2항과의 관계
계약서에 상대방의 부도, 회생절차 개시, 압류 등이 발생하면 기한의 이익을 상실한다는 조항을 미리 넣어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명시적 조항이 있다면 그 조항이 정한 사유와 절차에 따라 선이행의무자가 이행을 미루거나 대금을 조기 회수할 수 있으므로, 굳이 불안의 항변권의 요건을 별도로 다툴 필요 없이 계약 조항을 우선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민법 제388조도 채무자가 담보를 손상·감소·멸실하게 하거나 담보 제공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등의 사유가 있으면 채무자가 기한의 이익을 주장하지 못한다고 정하고 있어, 계약서에 별도 조항이 없더라도 이런 법정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이 규정을 함께 검토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계약서의 기한이익 상실 조항이 열거한 사유가 실제로 벌어진 상황을 정확히 포섭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예를 들어 조항에는 '파산신청'만 규정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회생절차 개시신청이 있었던 경우, 문언상 조항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공백이 있을 때 민법 제536조 제2항의 불안의 항변권이 보충적으로 기능합니다. 계약서에 명시된 사유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이행이 곤란해질 현저한 사유가 객관적으로 확인된다면 불안의 항변권을 근거로 이행을 거절할 여지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불안의 항변권을 행사하면 계약을 곧바로 해제할 수 있나요?
A. 아닙니다. 불안의 항변권은 이행을 일시적으로 미룰 수 있는 권리일 뿐, 그 자체로 계약해제 사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계약을 종료하려면 상당한 기간을 정한 이행최고 등 계약해제의 별도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Q. 단순히 소문으로 들은 신용불안만으로도 항변권을 쓸 수 있나요?
A. 어렵습니다. 판례는 상대방의 이행이 곤란해질 객관적·일반적 사정을 요구하므로, 막연한 소문이나 추측이 아니라 부도, 압류, 회생절차 개시 등 확인 가능한 사실관계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Q. 상대방이 나중에 담보를 제공하면 어떻게 되나요?
A. 상대방이 실질적인 담보를 제공하거나 이행 가능성을 회복하면 불안의 항변권은 소멸하고, 선이행의무자는 지체 없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담보가 형식적일 뿐 실효성이 없다면 항변권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Q. 계약서에 기한이익 상실 조항이 있으면 이 조항만 쓰면 되나요?
A. 조항이 정한 사유에 실제 상황이 그대로 들어맞는다면 그 조항을 우선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다만 조항이 열거하지 않은 사유라면, 민법 제536조 제2항의 불안의 항변권을 보충적으로 검토할 수 있습니다.
Q. 부동산 매매에서 잔금을 거절했다가 오히려 계약금을 몰취당할 위험은 없나요?
A. 불안의 항변권 요건을 실제로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절했다면 이행지체로 평가되어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등기부등본, 임차인 관련 자료 등 객관적 근거를 먼저 확보한 뒤 거절 의사를 통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Q. 불안의 항변권을 행사하려면 반드시 소송을 해야 하나요?
A. 항변권 행사 자체는 내용증명 등으로 이행거절 의사를 통지하는 것으로 가능하고, 소송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상대방이 다투어 오면 결국 소송에서 요건 충족 여부가 다루어지게 됩니다.
맺음말
불안의 항변권은 선이행의무자를 무조건 보호하는 조항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행이 현저히 불확실해진 예외적 상황에서만 작동하는 정교한 균형장치입니다. 신용불안이든 계약갱신요구권 행사처럼 이행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사정이든, 그 사유가 객관적 자료로 뒷받침되는지가 항변권 행사의 성패를 가릅니다. 막연한 불안감만으로 이행을 미루면 오히려 자신이 채무불이행 책임을 질 수 있으므로, 행사 전에 요건을 꼼꼼히 점검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특히 광교·수지처럼 고액 부동산 매매나 기업 간 공급계약이 활발한 지역에서는 선이행 구조의 계약이 흔한 만큼, 잔금이나 선급금을 앞두고 상대방의 신용 문제가 불거졌다면 이행을 거절하기 전에 관련 자료부터 정리해 보시길 권합니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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