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을 돌린 집, 닫히지 않은 문: 직계가족의 주민등록정보 열람
등을 돌린 집, 닫히지 않은 문: 직계가족의 주민등록정보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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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돌린 집, 닫히지 않은 문: 직계가족의 주민등록정보 열람 

임은지 변호사

■ 천륜이라는 발소리

어릴 때 떠난 집이 있습니다. 문을 닫고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등을 돌린 집. 그 이후로 오랫동안 조용히, 들키지 않으려 살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 동네에 자리를 잡고, 낯선 이름의 골목에 익숙해지고, 드디어 숨을 고르기 시작했을 때 그 문 앞에 다시 그 사람이 서 있습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주민센터에서 초본을 뗐다고 합니다. 법이 허락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가족은 천륜이다'라는 말은 따뜻한 위안이 아니라 끊어낸 줄 알았던 과거가 다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소리입니다.

■ 제도는 서류를 요구했다

우리는 종종 법이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받은 상처일수록, 어딘가 공식적인 울타리가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주민등록표 초본은 우리가 주민센터에서 발급받는 형식적 서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내가 어디에 살았고, 어디를 거쳐 왔는지 개인의 동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현행 주민등록법은 부모나 자녀라면, 따로 살고 연락을 끊었어도 본인 동의 없이 이 기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전입신고를 하는 순간, 새집 주소는 직계가족에게 열리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열람 제한 제도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 제도는 피해자에게 지나친 짐을 지웁니다. 보호를 받으려면 먼저 피해를 증명해야 합니다. 진단서, 신고 기록,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흔적.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토록 두렵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차분히 증거를 모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피해가 깊을수록 증거는 오히려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제도는 보호를 약속하면서도, 그 문 앞에 입증이라는 높은 턱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법원의 주소보정명령을 받아내면, 그 제한마저 무력화됩니다. 그 시절 아이였던 우리에게, 그런 것을 챙길 여유가 있었을까요. 증거가 없다는 것이 피해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너무 어렸거나, 너무 두려웠거나, 신고하면 다음 날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몰랐던 것뿐입니다. 과거에는 자녀 체벌을 훈육으로 여겼고,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보호자를 고발했을 때 감당해야 할 결과가 두려워 침묵을 택했습니다. 또는 종교적 억압이나 경제적 착취처럼 가정폭력의 법적 범주에 명확히 들어가지 않는 이유로 그 집을 나온 사람들에게, 지금의 법은 아직 충분한 언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제도는 보이는 상처만을 기준으로 삼고, 보이지 않는 상처는 그 기준 바깥에 놓입니다.

■ 법도 천천히 배웠습니다

물론 직계혈족의 열람 권한을 무조건 차단하는 것이 해답은 아닙니다. 고령의 부모를 부양하거나,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이 권한은 공동체가 유지해야 할 최소한의 안전망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의 기준은 손질이 필요합니다.

한때 우리 민법에는 부모가 자녀를 체벌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가족이니까 때릴 수도 있다고, 법이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주민등록 초본 열람 제도도 같은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가족이니까 알 수 있다는 생각, 가족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던 시각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2021년, 63년 만에 그 징계권 조항이 삭제됐습니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던 것들이 이제는 아동 학대가 됐고, 법은 천천히 가족 구성원 각각을 독립된 개인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열람 제도도 그 흐름을 따라가야 할 때입니다.

물리적 폭행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만 보호 받을 수 있는 구조는 너무 좁습니다. 정서적 학대, 경제적 착취, 오랜 시간에 걸쳐 무너진 관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질적인 파탄이 소명된다면 열람 제한이 가능하도록 문턱을 낮춰야 합니다. 거주지 정보는 사생활의 핵심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그것이 자동으로 열리는 구조는 지금 이 시대의 법이 머물러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상처에도 법의 언어가 닿을 수 있도록 제한의 기준을 유연하게 넓혀가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다음 걸음입니다.


임은지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등록 이혼 전문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등록 가사법 전문 변호사

✔서울가정법원 국선보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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