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급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던 조항이, 막상 공사나 납품이 끝나고 나면 발목을 잡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민원 처리는 수급사업자가 책임진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 비용은 을이 부담한다", "입찰내역에 없던 추가 작업도 무상으로 시공한다" 같은 문구가 계약서 한켠 특약사항 란에 작게 적혀 있는 식입니다. 원사업자가 우월한 거래상 지위를 이용해 자신이 부담해야 할 위험과 비용을 수급사업자에게 떠넘기는 이런 조항들은, 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효력을 인정받지는 않습니다. 최근 하도급법 개정으로 이런 부당특약 중 상당수는 계약서에 남아 있어도 처음부터 무효로 취급됩니다.
먼저 전체를 짚어보겠습니다: 계약서에 숨은 부당특약, 흔히 등장하는 세 가지 유형
부당특약이란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보다 우월한 거래상 지위를 이용해 계약서·발주서 등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끼워 넣는 것을 말합니다. 하도급 거래는 원사업자가 물량을 배분하는 구조이다 보니 수급사업자 입장에서는 불합리해 보여도 이의 없이 서명하는 경우가 많고, 그 결과 계약서만 보면 "합의된 조건"처럼 보이는 조항이 실제로는 협상력 차이에서 비롯된 사실상의 강요에 가까운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실무에서 자주 보이는 유형은 크게 세 갈래입니다. 서면(계약서·발주서)에 없던 추가 작업이나 사양 변경을 요구하면서 그 비용을 수급사업자에게 떠넘기는 경우, 원래 원사업자가 책임져야 할 민원 처리·산업재해 관련 비용을 수급사업자 부담으로 못박는 경우, 그리고 입찰 단계에서 제시되지 않았던 항목을 나중에 무상으로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에 원사업자의 손해배상책임을 수급사업자에게 전가하거나, 대금 지급을 미룰 목적의 조항을 끼워 넣는 사례도 함께 문제 됩니다.
문제는 이런 조항이 표준하도급계약서 양식이 아니라 특약사항 란이나 별첨 문서에 슬쩍 추가되는 경우가 많아, 계약 체결 당시에는 그 위법성을 알아채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공사나 납품이 끝난 뒤 비용 정산 단계에서야 비로소 그 조항의 무게가 드러나는데, 이 시점에는 이미 원사업자가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느냐"며 조항의 이행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많은 수급사업자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도장을 찍었으니 조항대로 이행해야 한다"는 생각인데, 하도급 거래는 물량 배분권을 쥔 원사업자와 그렇지 않은 수급사업자 사이의 구조적 힘의 차이를 법이 이미 전제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일반 민사계약과 달리, 계약서에 적혀 있다는 사정만으로 그 조항의 효력이 곧바로 인정되지 않고, 그 내용이 법이 정한 부당특약 유형에 해당하는지를 별도로 따지게 됩니다.
법은 이렇게 판단합니다: 부당특약 유형과 2025년 무효화 개정의 판단기준
하도급법은 2014년 제3조의4(부당한 특약의 금지)를 신설해,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거나 제한하는 계약조건, 즉 부당한 특약을 설정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당하게 침해·제한한 것인지는 계약 문구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 사이의 거래상 지위 차이, 그 조항이 통상적인 거래 관행에서 벗어난 정도, 수급사업자가 부담하는 위험과 실제로 받는 대가가 균형을 이루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핍니다.
같은 조 제2항은 부당특약으로 보는 유형을 구체적으로 규정합니다. 1호는 서면에 기재되지 않은 사항을 원사업자가 요구함에 따라 발생한 비용을 수급사업자에게 부담시키는 약정, 2호는 원사업자가 부담해야 할 민원처리·산업재해 등 관련 비용을 수급사업자에게 전가하는 약정, 3호는 입찰내역에 없는 사항을 요구함에 따라 발생한 비용을 수급사업자에게 부담시키는 약정입니다. 4호는 그 밖에 원사업자에게 부과된 의무를 수급사업자에게 전가하는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약정을 포괄적으로 규정해, 새로운 유형의 부당특약도 포섭할 수 있게 해 둡니다.
오랫동안 실무의 걸림돌은 이 조항을 위반해도 계약서상 특약 자체의 사법상 효력, 즉 계약이 무효인지까지는 법에 명시돼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시정명령을 내려도 이미 체결된 계약 조항 자체는 유효하다고 보는 시각이 있어, 수급사업자가 민사소송에서 그 조항의 무효를 별도로 다퉈야 하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2025년 4월 1일 공포된 개정 하도급법은 제3조의4에 제3항을 신설했고, 공포 후 6개월이 지난 2025년 10월 2일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신설된 제3항의 구조는 이원적입니다. 제2항 1호부터 3호에 해당하는 부당특약은 별도의 추가 입증 없이 그 부분에 한정해 당연히 무효로 취급됩니다. 반면 4호에 해당하는 부당특약(시행령·고시로 정하는 유형)은 그 약정이 당사자 일방에게 현저하게 불공정한 경우에 한해 그 부분만 무효가 됩니다. 즉 서면에 없던 비용 전가, 민원·산재비용 전가, 입찰내역 외 비용 전가는 계약서에 서명했더라도 그 조항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다룰 수 있고, 나머지 계약 내용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원사업자에 대한 제재도 함께 규정돼 있습니다. 부당특약을 설정한 원사업자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시정조치·과징금 등 행정제재를 받을 수 있고, 하도급법 제30조에 따라 하도급대금의 2배에 상당하는 금액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다만 부당특약 자체만으로는 손해액의 3배까지 물을 수 있는 하도급법 제35조 제2항의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은 구분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 그 특약이 실제 대금 후려치기나 부당한 위탁취소 등 별도 위반행위와 함께 이루어졌다면, 그 행위 자체는 별도로 3배 배상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숫자로 보면 무효화의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예를 들어 계약서 특약사항에 "현장 민원 처리비는 수급사업자 부담"이라는 조항이 있어 공사 기간 중 민원 처리 명목으로 800만 원을 수급사업자가 떠안았고, 준공 정산 단계에서 입찰내역에 없던 추가 자재 비용 1,200만 원까지 대금에서 공제당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조항이 각각 제2항 2호(민원처리비 전가)와 3호(입찰내역 외 비용 전가)에 해당한다면, 두 조항 모두 그 부분에 한정해 당연 무효이므로 이미 부담했거나 공제당한 합계 2,000만 원을 부당이득으로 반환받는 것이 이론상 가능해집니다. 조항이 무효라는 사실 하나가 실제 회수 가능한 금액으로 바로 연결되는 셈입니다.
김상훈 변호사의 대응, 이렇게: 무효 주장부터 분쟁조정·공정위 신고까지
쟁점이 정리됐다면, 실제로는 다음 순서로 대응합니다.
계약서·특약사항·발주서 대조 — 표준하도급계약서와 실제 체결한 계약서의 특약사항 란을 나란히 비교해, 서면 미기재 사항 비용 전가·민원 및 산재비용 전가·입찰내역 외 비용 요구 같은 문구가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해당 조항과 실제 청구·공제 내역을 함께 보관해 둡니다.
무효 근거를 호수별로 정리 — 문제 조항이 1호~3호에 해당하면 그 자체로 무효를 주장할 수 있고, 4호에 해당하면 업계 관행·동종 계약과의 비교·비용 부담의 불균형 정도 등 "현저히 불공정하다"는 점을 뒷받침할 자료를 함께 준비해야 합니다.
하도급분쟁조정협의회에 조정 신청 — 별도 비용 없이 인터넷·방문·우편으로 신청할 수 있고, 접수일로부터 60일 이내 처리를 목표로 사실조사 후 조정안을 제시합니다. 조정이 성립되면 재판상 화해와 같은 효력이 생겨 소송 없이도 분쟁을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조정이 안 되면 공정거래위원회 신고 — 조정불성립 시 그동안 정리한 자료를 첨부해 공정위에 신고서를 제출하면 직권조사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신고를 이유로 거래 중단·물량 축소 등 불이익을 주는 행위는 하도급법 제19조로 금지돼 있으므로, 거래를 계속하는 중이라도 신고 자체를 주저할 이유는 없습니다.
민사소송으로 무효 확인과 반환 청구 — 이미 부당특약에 따라 비용을 부담했거나 대금에서 공제당했다면, 그 조항의 무효를 전제로 부당이득반환 또는 손해배상을 별도로 청구해 이미 지출한 금액을 되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망설이는 사이, 시간은 불리해집니다: 계약이 진행 중이라도 지금 조항부터 점검
부당특약은 계약이 다 끝난 뒤가 아니라 계약이 진행되는 중에도 다툴 수 있습니다. "이미 서명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면, 다음 계약에서도 같은 조항이 반복되고 그 사이 비용 부담은 계속 쌓입니다.
문제가 된 조항이 몇 호에 해당하는지, 그리고 이미 부담한 비용을 되돌려받을 수 있는지는 계약서와 실제 이행 경과를 함께 봐야 판단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지금 거래 중인 계약서의 특약사항이 석연치 않다면, 그 조항의 효력부터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률 문제는 초기 대응이 중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김상훈 변호사에게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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