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두 사람은 원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이었고, 사소한 오해로 사이가 틀어진 뒤로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대방은 의뢰인을 차 안에 태운 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습니다.
의뢰인은 그를 고소했고, 재판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이어진 끝에 유죄로 확정되었습니다.
실형은 면했지만,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만큼 중한 범죄였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판결이 확정되자마자 상대방은 조롱 섞인 연락을 다시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식의 문자였습니다.
의뢰인은 두려움에 못 이겨 신고를 거듭했지만,
신고도 법원의 결정도 상대방을 막지 못했습니다.
결국 의뢰인은 상대방이 몸담고 있던 직장의 인사 담당자에게,
확정된 유죄 판결문을 보내는 것을 마지막 선택으로 골랐습니다.
'이 사람이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이번엔 그녀를 피의자로 만들었습니다.
상대방이 그녀를 명예훼손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맞고소한 것입니다.
1.
사건 기록을 처음 받아 든 날, 저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의뢰인은 분명 피해자였습니다.
오랜 기간 상대방으로부터 폭행을 당했고,
그 사건은 법원에서 유죄로 확정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 앞에 놓인 사건은 그녀가 '고소인'이 아니라 '피의자'로 적힌 사건이었습니다.
상대방의 유죄 판결문을, 상대방이 재직하던 곳의 인사 담당자에게 보낸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서면만 보면 이렇게 읽힐 수 있었습니다.
"이미 형을 다 살게 해놓고, 이번엔 그 사람 밥줄까지 끊으려 했다."
수사기관이 이 사건을 어떤 얼굴로 바라볼지,
저는 그게 가장 먼저 걱정되었습니다.
오래 끌어온 두 사람의 분쟁을 지켜본 수사관이라면,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둘 다 어지간히 독하네. 이번엔 이쪽 차례인가 보다."
법리는 명확했습니다.
정보를 받은 사람은 비밀유지 의무가 있는 담당자 한 명뿐이었고,
판례상 공연성이 인정되기 어려운 사안이었습니다.
설령 인정되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될 여지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문을 정리하면 정리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편해지지 않았습니다.
법리가 맞다는 것과, 그 법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2.
의뢰인을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합니다.
그녀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까 봐 무서워요."
저는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두려워해야 하는 건 처벌이 아니라,
'내 진심이 다르게 읽히는 것'이라는 걸 그때 다시 배웠습니다.
조사가 다가올수록 저는 그녀에게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화내지 마시라고.
억울함을 토해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사건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정말로 하고 싶은 건 복수가 아니라,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끝내는 것' 아니었냐고
— 몇 번이고 되물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엔 서운해했습니다.
"저는 피해자인데, 왜 제가 또 조심해야 하나요."
맞는 말이었습니다. 저도 그 억울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조사실 안에서는, 억울함을 표현하는 방식이 결과를 가른다는 걸 그녀에게 설명하는 것이 제 일이었습니다.
3.
일이 복잡해진 건 그 무렵이었습니다.
경찰 조사를 마친 뒤, 그녀가 파일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검토를 받아봤는데, 여기서는 이렇게 보더라고요.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거겠죠?"
읽어 내려가는데, 처음엔 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논리는 그럴듯했고, 문장은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혐의없음 가능성이 높습니다"라는 문장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불안한 의뢰인에게는 그 자신감 자체가 위로였을 겁니다.
그런데 한 대목에서 저는 읽기를 멈췄습니다.
조사 당시 그녀는 "목적 외 용도로 보낸 게 맞느냐"는 질문에 "네"라고 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파일은 이 부분을, '법리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진술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짧게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읽었습니다.
이미 조서에 남은 진술을, "의미 없다"고 선언하고 넘어가는 것
— 그건 방어가 아니라 회피에 가까웠습니다.
수사기관이 그 진술을 다시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아무 준비 없이 서 있게 될 터였습니다.
자백처럼 보이는 말 한마디는,
무시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왜 그렇게 답했는지'를 설명해야 비로소 힘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그 파일은 그녀의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공익을 위한 결단'으로만 그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게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단정한 직선일 리 없다는 걸,
수사관들은 매일 확인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매끈한 선의는, 오히려 '누군가 짜준 이야기 아닌가'라는 의심을 부릅니다.
저는 며칠 밤 그 파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자신 있게 쓰인 그 글이 자꾸만 눈에 밟혔습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조심스러운 건 아닐까,
저 정도로 확신을 줄 수 있다면 그 확신 자체가 힘이 되는 건 아닐까
— 그런 흔들림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4.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검토, 참고는 하되 그대로 따라가진 않았으면 합니다."
그녀는 잠깐 말이 없었습니다.
"왜요, 거긴 이렇게 명확하다고 하는데."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났습니다.
저는 그 순간이 이 사건에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법정 다툼도 아니고, 상대방과의 신경전도 아닌, 지치고 불안한 의뢰인을 다시 설득해야 하는 자리였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백처럼 남은 말은, 없었던 일처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마음은 하나가 아니었을 겁니다.
두려움도 있었고, 화도 있었고, 그럼에도 지키고 싶었던 원칙도 있었겠지요.
그 여러 겹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는 게,
오히려 더 믿을 만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녀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습니다.
"그럼, 변호사님 하자는 대로 할게요."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신뢰인지,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5.
그 뒤로 의견서를 몇 번이고 다시 썼습니다.
자백처럼 보였던 그 진술은, '무의미하다'고 지우는 대신 왜 그런 답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 법률 용어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사정, 질문의 취지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 — 을
하나하나 짚어 정면으로 풀어냈습니다.
행위의 동기 역시 '오로지 선의'라는 단선적인 이야기 대신,
"물론 이것이 온전한 변명이 될 수는 없으나"라는 문장으로 먼저 정직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2년 가까이 견뎌온 시간과 두려움,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절제하려 했던 흔적들을 쌓아 올렸습니다.
시간이 걸렸습니다.
의견서를 다듬는 밤이 늘어날수록, 저는 자꾸 그 파일의 자신 있던 문장들을 떠올렸습니다.
그게 더 쉬운 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쉬운 길과 안전한 길은, 제 경험상 대개 다른 길이었습니다.
6.
결과가 나온 날,
의뢰인은 짧은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으셨죠."
저는 그 문장을 읽으며, 이 일이 늘 법조문과 씨름하는 일만은 아니라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때로는 불안한 사람을 붙잡고, 흔들리는 확신을 다시 세우고, 더 쉬워 보이는 길을 거절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법률 조언의 값어치는, 얼마나 자신 있게 들리느냐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한 줄, 이미 지나간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붙잡는 정밀함에 있습니다.
그 밤, 파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흔들렸던 저 자신을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흔들렸기 때문에, 더 오래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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